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셸 푸코 (문단 편집) == 여담 == * 푸코는 후기 구조주의자로서 포스트모던에 속하는데, 둘 중 하나를 '''굳이 따지자면''' '[[구조주의]]'에 가깝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던은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통일된 이론'(거대 서사)을 거부하는데, 푸코는 전·중·후기를 통틀어서, '담론의 구조'로 모든 권력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권력 '속'에서 '자유의 공간(해체의 여지)'를 남겨놓는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모든 곳에 산재되어 있는 권력의 구조 개념을 버리지는 않는다. 즉, 푸코에게서 '자유'는 권력의 구조를 느슨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지, 구조 자체를 없앰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없앨 수도 없다. 그래서 푸코 자신은 비록 스스로 구조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푸코의 전기작가 디디에 에리봉은 앞선 점들을 감안해서 푸코를 '구조주의자'로 평가했다. 이와는 반대로 [[질 들뢰즈|들뢰즈]]의 경우, 정해진 구조 '속'에서 해체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거대 구조 자체를 해체해서 새로운 여러 다른 구조들을 만들어가는 '리좀식' 사유를 하기 때문에, 포스트모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 [[게이]]이며 사회학자 다니엘 드페르({{{-1 ''Daniel Defert''}}})와 연인 관계였다. 푸코 사후 그의 유고 정리도 드페르가 하였다. * 프랑스에서는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에이즈]]로 인해 사망한 최초의 유명인사였다. 당시 에이즈는 "게이 암"과 같은 경멸적인 어조로 불렸었는데, 푸코가 "게이 암"으로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좌파 신문 리베라시옹에서는 명망있는 좌파 지식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음모로 간주하며 애써 푸코가 에이즈로 죽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도 했다. * 그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인 《성의 역사》에서 고대 [[그리스]]의 [[미소년]] [[동성애]] 이야기가 매우 상세하게 나온다. 물론 당시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매우 인문학적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학술적인 책이므로 상당히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 한국에서는 형벌, 감옥 제도에 대한 연구를 통해 권력의 작동 방식에 대해 탐구한 <감시와 처벌>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그가 [[제러미 벤담]]의 [[판옵티콘]] 개념을 빌려와 논지를 전개한 부분은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다만 《감시와 처벌》을 통해 널리 알려진 "규율 권력", 즉 개개인의 생각에 미시적인 방식으로 개입하는 권력은 중기 푸코의 생각이고, 이후 후기 푸코가 시작하는 《성의 역사 1권 : 앎에의 의지》에서는 인구관리를 위해 권력이 개입하는 '생명권력({{{-1 ''bio-pouvoir''}}})과 통치성'이라는 개념으로 나아간다. * 《감시와 처벌》의 서문에서 묘사된 루이 15세 시해 미수범 [[로베르프랑수아 다미앵]]의 잔혹한 공개처형 장면이 널리 알려져 있다. 다미앵은 신체를 산 채로 불로 태우고 뼈를 뒤트는 등의 고문 끝에 거열형으로 처형되었는데, 푸코는 이러한 잔혹한 스펙터클로서의 처형과 다음 세기의 처벌 및 훈육 방식 사이에 명백한 단절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책의 논의를 시작한다. * 철학자 [[자크 데리다]]와는 고등사범학교 동문이자 사제지간이었다. 고등사범학교에서 푸코의 강의를 들었던 데리다는 이후 《광기의 역사》의 해석을 두고 푸코와 갈등을 빚었고, 푸코도 데리다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두 철학자 간의 교류는 오랫동안 단절되었다. 이 소원해진 관계는 데리다가 체코에서 체포되었을 때 그를 구하기 위해 푸코가 많은 노력을 하면서 다소 회복된다. * 1977년에 잠시 신문기자가 된 적이 있다. 당시 [[이란 혁명]]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는데, 푸코는 이란까지 현장취재를 가서 야당지도자들과 거리의 사람들을 취재했다. 프랑스에 머물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호메이니]]를 찾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호메이니와 직접 만나서 인터뷰를 한 것은 아니다. 단지 호메이니가 다른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모습을 관찰했었을 뿐이었다.] 당시 이란의 군주였던 [[팔라비 2세]]는 시위대를 그야말로 피로 물들였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탄압을 행사했기 때문에, 이란 민중들은 이슬람 정부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광범위한 공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걸 직접 목격한 푸코는 호메이니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기사를 썼는데, 그 기사를 보고 격분한 이란 여자의 반박이 프랑스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익명의 이란 여자는 호메이니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푸코를 비난하면서 "비밀경찰과 이슬람 광신도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이슬람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는 현재의 상태보다 더 숨 막히는 덮개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푸코의 반응은 "이슬람에 대한 미래가능성을 광신이라고 한꺼번에 싸잡아 거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 [[푸코의 진자]]로 유명한 [[레옹 푸코]]와는 성씨만 같고 생몰시열대까지 전혀 다른 인물이나, '푸코' 성씨를 쓰는 인물들 중 유명한 사람이라서 종종 혼동된다. * 고등사범학교 시절 스승인 [[루이 알튀세르]]의 권유로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지만, 몇 개월 지나지 않아 탈당했다.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말과 사물》을 출간했을 때는 아예 공산주의 계열 언론들의 비판을 받았었다. 그래서 푸코의 저작을 살펴보면 마르크스주의와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알튀세르의 제자 중 한명이자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에티엔 발리바르]]가 쓴 [[https://en-movement.net/226|미셸 푸코의 반 마르크스]]라는 칼럼도 있으니 현대 철학 분야에 관심이 있다면 찬찬히 읽어보자. 다만 현재에는 푸코와 마르크스를 엮어서 사유하려는 노력도 간간히 있는데, 한국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푸코, 발리바르와 마찬가지로 알튀세르의 후학인 자크 비데가 꾸준히 이 분야에서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조던 피터슨]]은 그런 마르크스주의와 푸코의 적대적인 입장 차이를 모르고[* 이런 맥락이 나오게 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마르크스주의]]의 연합'''이라는 자신의 평소 주장을 언급하며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학자인 푸코를 소환한 것. 정작 [[슬라보예 지젝]] 뿐만 아니라, [[앨런 소칼]] 등 대다수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극혐한다.] [[슬라보예 지젝]]과의 토론에서 '푸코는 공산주의자이자 급진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잘못된 정보를 말해서 망신을 당한 바 있다.[* 동시에 피터슨이 급진적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비난한 또 다른 철학자는 [[해체주의]]의 대명사인 [[자크 데리다]]. 이 토론 이후 피터슨은 [[대륙철학]]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신뢰도를 상실했다.] * 푸코의 반[[마르크스주의]]적 성향은 그가 당시 '신철학' 사상가들을 지지한 것으로도 확인된다. 1977년, 좌파 내부에서 등장한 '신철학' 사상가들은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가 그 계획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전체주의를 탄생시킬 수밖에 없다며,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그래서 기존 공산주의 정당에서 갈라져 나와 '''반마르크스주의 좌파'''를 구성해야 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는데, 이를 푸코가 지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질 들뢰즈]]가 비판하자 푸코는 자신의 생각을 재고하기보다는 그와의 결별을 선택했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 앙드레 글뤽스만 등 신철학파에 속한 철학자들은 미셸 푸코처럼 [[루이 알튀세르]]에게서 사사했지만 성향 차이로 반마르크스주의로 선회한 인물이었고, 따라서 푸코는 이들을 지지한다. 그러나 [[질 들뢰즈]]는 [[펠릭스 가타리]]와 교류하며 말년으로 갈수록 마르크스주의적인 신념이 강해졌기 때문에 이들이 계급투쟁을 방해하는 부르주아 철학을 전개한다고 생각해서 신철학파를 비판했다. 이런 관점 때문에 둘은 갈라서게 되었다.[[https://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6305.html|#]]] 하지만 푸코는 들뢰즈에 대해 애증을 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푸코가 죽기 직전 병실에서 들뢰즈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친구들에게 고백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아쉽게도 이들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고, 푸코의 장례식 때 들뢰즈가 참석하여 추도사를 읊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들뢰즈는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철학을 다룬 책 『푸코』를 썼다. [각주] [[분류:프랑스의 게이]][[분류:프랑스의 현대 철학자]][[분류:프랑스의 무종교인]][[분류:프랑스의 인권운동가]][[분류:1926년 출생]][[분류:1984년 사망]][[분류:푸아티에 출신 인물]][[분류:파리 고등사범학교 출신]][[분류:파리 대학교 출신]][[분류:성소수자 인권운동가]][[분류:에이즈로 죽은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